[일본] 겸허, 견실을 모토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제1화
겸허, 견실을 모토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제1화
나에겐 전생의 기억이 있다────.
…네, 정신 나간 소리 아닙니다. 창피해서 아무한테도 절대 말 못 하지만, 진짜예요.
그걸 깨달은 건 초등학교 입학시험[1]을 앞둔 무렵이었다. 내 이름 '킷쇼인 레이카(吉祥院麗華)'라는 글자를 볼 때마다,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하고 계속 찜찜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이 "레이카도 내년엔 이 학원에 다니는 거란다"라며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건물 앞으로 나를 데려갔을 때. 그 커다란 정문 옆에 걸린 '즈이란(瑞鸞)학원 초등부'의 '즈이란학원'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터졌다.
'즈이란학원' '킷쇼인 레이카', 이거 『너는 나의 돌체(dolce)』에 나오는 학교랑 등장인물 이름이잖아ー!!
그, 오랜 세월의 찜찜함(이라고 해봤자 태어난 지 겨우 몇 년이지만)이 풀렸을 때의 그 쾌감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키미돌'이었구나~. 아~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런 거였어~. 하고 들떠 있던 다음 순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깨닫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너는 나의 돌체』.
이건 전생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순정만화다. 완결된 뒤엔 인기 아이돌을 기용해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내용은, 명문가 자제들이 다니는 사립 즈이란학원 고등부에 서민 출신 특별장학생[2]인 주인공이 입학하면서 시작된다. 뭐 하나 빠짐없이 어마어마한 부자인 학생들 틈에서, 서민인 주인공은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몇 안 되는 서민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취미인 과자 만들기에 열중하는 나날. 그러던 어느 날, 학원에서 통칭 '황제'라 불리는 인물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는 서민 주제에 황제에게 다가가는 주인공을 용납하지 못하고, 주인공을 향한 집요한 괴롭힘이 시작된다.
뭐, 그 괴롭힘의 주범이 바로 킷쇼인 레이카, 그러니까 나란 말이지.
결국 마지막엔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두 사람이 맺어져 경사, 경사. ……인데, 끝의 끝까지 두 사람을 방해하고 주인공을 실컷 괴롭힌 킷쇼인 레이카는, 부모의 힘을 이용해 황제와의 약혼까지 성사시켜 놓고, 자 이제 약혼 발표 파티다 하는 순간에 철저하게 짓밟힌다. 황제가 수많은 하객 앞에서 주인공과의 약혼을 전격 발표해 레이카에게 망신을 준 데다, 지금까지의 앙갚음이자 앞으로 방해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킷쇼인가(家) 회사의 주식을 사들여 경영권을 빼앗고, 레이카 아버지의 비리를 폭로해 집안을 통째로 몰락시킨다. 선민의식이 강해 서민을 깔보며 살아온 레이카가, 상류층에서 쫓겨나 서민으로 굴러떨어진다. 자랑스러운 곱슬머리[3]를 산발한 채 미친 듯이 절규하는 레이카를 보며, 지금까지의 악랄한 행적을 떠올린 독자들은 "꼴좋다!" 하고 후련해했다. 전생의 나도 "앗싸ー!" 하고 환호했다.
하지만 이게 이번 생 내 최후가 된다면, 얘기가 다르다. 절대 싫어, 저런 건 싫다고. 어째서 하필이면, 내가 정통 악역 캐릭터 킷쇼인 레이카가 되어 있는 거냐고ー!!
제발, 꿈이라면 지금 당장 깨어나 줘.
────안타깝게도, 꿈은 깨지 않았다.
겨우 다섯 살짜리 몸에는 충격이 너무 컸는지, 그대로 픽 쓰러져 머리에 열이 올라 앓아누웠다. 파멸이 예정된 미래가 무서워, 열에 시달리며 엉엉 울었다.
애초에 전생의 나는 뼛속까지 서민이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쭉 공립이었고, 고등학생 때는 휴대폰 요금 벌려고 알바도 했다.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 가정에서 태어난, 보통 체격에 평범한 얼굴을 한, 정말 어디에나 있는 그런 여자애였다.
기억나는 건 전문대[4]를 졸업하고 취직한 무렵까지. 그 이후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노년을 맞이했다는 기억이 전혀 없다. 혹시 스무 살 남짓에 죽어 버린 걸까. 기억이 없다는 건 그런 뜻이겠지. 아니면 사고 같은 걸로 식물인간이 돼서, 멀쩡했던 시절 좋아하던 만화 꿈을 계속 꾸고 있는 거라거나.
만화 속으로 환생했다는 설보다는, 식물인간이 돼서 꿈을 꾸고 있다는 설이 더 그럴듯하지만.
그런데 열이 나면 괴롭고, 넘어지면 아프고, 음식은 맛있고. 감각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 생생한 감각을 아는 이상, "어차피 꿈이니까 아무렇지 않아~" 하고 딱 잘라 넘기는 건 도저히 못 하겠다. 환생이든 꿈이든 상관없지만, 빙의할 거면 누구든 좋으니 제발 레이카만은 아니었으면 했다. 간절히 그렇게 바란다.
열병에서 회복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입학시험에 떨어져서 즈이란학원에 안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즈이란학원은 부자 학교의 최고봉. 그 학원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큰 명예가 된다. 우리 킷쇼인가는 옛 화족(華族)[5]의 피를 이어받아 계열사를 여럿 거느린 명가다. 부모님은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선민의식 덩어리다. 그래서 0세 때부터 영유아 교실[6]에 다니며 즈이란학원 입시 대비를 주입받아 왔다. 유치원도 즈이란 합격률이 높은 명문 브랜드 유치원이었으니까. 이대로라면, 혈통과 가문과 재력을 갖춘 나는 즈이란에 붙을 거다. 하지만 학원에 다니면 기다리는 건 비참한 최후다.
주인공 일행과 엮이지 않고 다른 인생을 걷는다면, 어쩌면 파멸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즈이란만 부자 학교인 것도 아니잖아. 명문 아가씨 학교는 얼마든지 있다고. 그래, 그렇게 하자!
……라는 결심도, 부모님 얼굴을 본 순간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선민의식 덩어리인 부모님이 '즈이란학원에 떨어진' 딸을 킷쇼인가의 낙오자로 여기고 내쳐 버리는 건 아닐까 싶어서. 아무리 전생(?)의 어른 기억이 있다지만, 아직 다섯 살짜리 아이가 앞으로 계속 부모에게 냉대받는 건, 힘들다.
게다가 즈이란 초등부 시험에 떨어져도 중등부 시험이라는 수가 있으니까. 뭐, 그 학원에는 '그것'이 있으니 초등부부터 들어가야 진짜 즈이란인 거고, 중등부부터 들어가면 아마 부모님도 마냥 만족하시진 않겠지만.
어머님은 이미 붙은 거나 다름없다는 태도고(합격도 전에 초등부 앞에서 "레이카가 다닐 학원"이라고 말해 버렸으니까), 친척은 거의 전원이 즈이란 재학생이거나 졸업생이다. 그런 상황에서 즈이란 시험을 일부러 망칠 용기는, 뼛속까지 서민이던 기억을 되찾아 버린 소심한 나로서는 도저히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마음 단단히 먹고 즈이란에 가자.
하지만 만화 각본대로 악역 캐릭터가 되는 것만큼은 전력으로 피하고 싶다. 미움받는 존재가 되는 건 괴로우니까. 그리고 만에 하나 피하지 못하더라도, 파멸당한 뒤에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부터 할 수 있는 대비는 다 해두고 싶다.
- 화합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7]. 쓸데없이 적을 만들지 않는다.
- 낭비하지 않는다. 받은 용돈은 차곡차곡 저금. 몰락 후 학비에 보탠다.
- 황제와 엮이지 않는다. 물론 고등부에서 입학해 오는 주인공과도 엮이지 않는다.
- 두 사람의 연애에는 관심 없어요, 혹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어요, 하는 어필을 은근히 한다. '은근히'가 중요. 여기서 존재감을 드러내선 안 된다.
- 설령 몰락하더라도 내 힘으로 벌어먹을 수 있도록, 평생 굶을 일 없는 직업을 갖는다. 목표는 공무원.
좋아. 일단은 이 정도면 되겠지.
본의 아니게 악역 포지션이 된 킷쇼인 레이카, 평온무사한 인생을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부가정보
- 오주켄 (お受験) — 일본에서 사립·국립 초등학교(및 유치원) 입학시험을 높여 부르는 말. 필기뿐 아니라 행동관찰·면접·부모 면접까지 보는 경우가 많아 온 가족이 함께 준비한다. 본래 유복하거나 지위 높은 집안이 치르던 시험이라 존칭 'お'를 붙여 부르게 되었다. 참고 링크
- 특별장학생 (特待生) — 입학시험이나 재학 중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입학금·수업료 등을 면제하거나 장학금을 지급하는 '특별대우 학생'의 준말. 주로 사립 학교가 우수 학생을 확보해 진학 실적과 명성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운영한다. 참고 링크
- 곱슬머리 (巻き髪) — 고데기나 컬링 아이론으로 인공적으로 만 컬 스타일의 머리. 태어날 때부터 곱슬인 '巻き毛(마키게)'와는 구별되며, 일본에서 여성들이 즐기는 대표적 헤어스타일이다. 원문에서 레이카의 '자랑스러운 곱슬머리'는 손질한 컬 스타일을 가리킨다. 참고 링크
- 전문대 (短大, 단기대학) — 수업 연한 2~3년의 단기대학. 4년제 대학과 달리 학부 없이 학과 단위로 운영되며 졸업 시 '단기대학사' 학위를 준다. 유치원 교사·보육사·영양사 등 실무 인력 양성에 강해 한국의 전문대와 비슷한 위상이다. 참고 링크
- 화족 (華族) — 1869년(메이지 2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한 일본 근대의 귀족 계급. 1884년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5등작 제도가 정해졌고, 일본국헌법 시행에 앞서 1947년 폐지되었다. '옛 화족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설정은 킷쇼인가가 유서 깊은 명문가임을 강조한다. 참고 링크
- 영유아 교실 (幼児教室) — 어린 자녀의 조기교육과 입시 대비를 위해 다니는 유아 학원. 의식이 높은 가정은 0세부터 보내며, 영유아기에는 두뇌·발달 자극과 부모-자녀 상호작용 프로그램이 중심이고 점차 초등 입시 대비로 이어진다. 참고 링크
- 화합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 (和を以て貴しとなす) — 쇼토쿠 태자가 604년경 제정한 것으로 전하는 십칠조 헌법 제1조. '화합을 귀하게 여기라'는 뜻으로, 논어의 구절을 전거로 삼아 대립·다툼을 삼가고 조화를 이루라는 정신을 담았다. 주인공이 파멸을 피하려 세운 첫 번째 처세 원칙이다. 참고 링크